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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츠라]선물

W.동

(BGM:  https://youtu.be/k3UiZwjmXQE)

창문에 달이 서렸다. 신경에 거슬려 그만 커튼을 닫아버린 토시로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복도를 잠시 걸어온 것뿐임에도 옷깃에 진한 향수 냄새가 스며들었다. 새벽바람보다 짙게 코 주변을 맴도는 은은한 장미향에 인상을 찌푸리곤 시계를 바라보았다. 두 시. 이른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창문 밖이 웅성거리는 까닭은 날짜만으로도 충분했다. 젠장, 그놈의 성탄절. 낭만은 무슨. 전날부터 건물 앞 소복이 쌓인 새눈이나 치우려 뻐근해진 어깨를 괜히 붙잡았다. 뚜둑, 묵직한 뼈 소리가 초침과 함께 울렸다. 본래 시간보다 늦는 기녀에 오히려 안심한 토시로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불길 없는 담배가 물린 입술 사이로 새하얀 입김이 퍼졌다. 호위를 목적으로 왔다가 마담의 페이스에 휘말려버린 게 문제였다. 홀로 하룻밤을 보내겠다고 그토록 말했건만, 굳이……. 차라리 문을 잠가버리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토시로가 바닥에 발을 내리고 문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 창호지에 그림자가 새겨졌다. 머리가 긴 여인. 뻔한 산타 코스튬.

 

“잠시 들어도 되겠습니까.”

 

그의 행동은 단정한 말보다 빨랐다.

 

“이미 문을 열어놓고서는…….”

 

토시로가 황당한 표정을 내보이자 야살스럽게 웃은 코타로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코타로가 앞으로 다가갈수록 토시로는 뒷걸음질 쳤다. 도도하디 곧은 코타로의 행동에 이끌린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토시로가 침대 위로 앉고, 가늘고 흰 손이 그의 옷 안을 파고들었다. 차가운 촉감에 토시로의 몸이 흠칫 떨렸다.

 

“많이 기다리셨나봅니다. 이렇게 잘 느끼시는 것 보면.”

“편한 대로 생각 해.”

“부장님은, 솔직하지 못하시군요.”

 

코타로의 손길은 그의 어조와 닮았다. 나비의 날갯짓마냥 느리면서도 곳곳이 파고들어 정신을 긴장시켰다. 그마저 토시로에게는, 귀찮은 하나의 몸짓이라도. 다른 한 손이 토시로의 턱을 받치고 포근한 입술이 맞닿았다. 볼품없이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애태우듯 가볍게 입술을 떨어트리다 혀로 한 번 훑고는, 다시 맞닿았다. 기막히게 환장할 묘술이군. 귀찮다는 듯 상대를 바라보던 토시로의 눈은 곧 불어온 바람에 놀라 커졌다. 커튼이 벌어지며, 그 사이로 들어온 달빛이 상대의 눈동자를 비추는 순간. 담갈색 안광이 서늘하게 토시로의 숨통을 막아들었다. 익숙한 느낌에 놀란 눈을 천천히 거두며 재빨리 코타로의 제 턱을 받치던 손목을 붙잡은 토시로가 낮게 으르렁댔다. 먹이를 찾은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카츠라.”

 

토시로의 말과 함께 온순했던 코타로의 눈꼬리에 날이 서렸다. 더 이상의 연기는 필요 없다는 듯. 들켰음에도 당황하기는커녕 뻔뻔해지는 코타로의 행동에 헛웃음친 토시로가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갑작스러우면서도 확고한 신체를 꽉 쥐는 고통에 구겨진 아미는 머지않아 되돌아왔다. 코타로의 여유로움은 오히려 토시로를 잡아먹을 듯 했다.

 

“너, 지금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왔다는 건 알고 있냐?”

 

조소와 함께 떨어진 대답은 토시로를 더 황당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날 잡을 생각인가?”

“당연하지.”

 

토시로가 검은 눈썹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손목을 잡은 손을 유지하고서 남은 손으로 수갑을 찾으려 뒤적이는 토시로의 몸짓을 응시하던 코타로가 말했다.

 

“소용없어. 이미 빼놨으니까.”

 

코타로가 구속되지 않은 손에 쥐어진 수갑을 검지로 가볍게 돌리고 바닥으로 날려버렸다. 처음부터 몸을 뒤졌던 이유가……, 허. 수갑이 떨어진 곳을 멍하니 보던 토시로가 다시 한 번 코타로의 이름을 읊조렸다. 소름끼치게 낮고 위협적인 음성은 코타로의 흥미를 돋울 뿐이었다. 곧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저를 잡을 듯한 토시로의 눈빛에 다시 야살스럽게 웃은 코타로가 조심스레 제 손목을 잡은 토시로의 손을 빼내었다.

 

“진정해. 알다시피 난 이미 과격파에서 돌아섰고…… 당장 여기서 뭘 할 생각도 아니라네. 난 그저, 이 특별한 날에 신센구미 부장님께 선물이나 하나 줄 겸 해서 온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다른 이도 아닌 네 말을.”

“뭐, 편한 대로 생각 해.”

 

코타로의 손이 토시로의 어깨를 밀었다. 자태는 부드러웠으나 결코 물렁하진 않았다. 토시로의 허리 위에 앉은 코타로가 손목에 새겨진 붉은 자국을 혀로 핥아냈다. 목울대가 넘겨지는 토시로의 목선을 따라 손가락을 훑은 코타로가 말했다.

 

“자네는 공과 사를 잘 구별하는 줄 알았는데……. 그저 즐겨. 그러라고 자네의 상사가 친히 내려준 시간이 아닌가. ‘평소’처럼, 즐기면 그만일 것을.”

“구분 못 하는 건 너이지 않나? 난 그놈을 호위하러 온 거지 이딴 유흥이나 즐기려고 온 게 아니야. 그리고 그 ‘평소’는 이제 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자네도 참 재미없이 사는군. 이런 날에 일이라니…… 기껏 들고 온 선물이 무안해지게.”

“선물?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날카로운 말은 코타로에게 향함과 동시에 자신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했다. 놈이 무슨 수작을 벌이든, 이번엔 기어코 넘어가지 않으리라고. 토시로의 몸 온 곳에 돋은 긴장을 유심히 보던 코타로가 느린 어조로 대답했다.

 

“수작이라니, 섭섭하네.”

“이정도 말했으면 그냥 내려오…….”

“히지카타.”

“…….”

 

가늘고 흰 손이 코타로의 몸을 둘러싼 천을 벗기기 시작했다. 깜깜한 방 안에서 코타로만은 달빛이라도 삼킨 듯 선명하게 다가왔다. 저 호명에도, 간사한 손짓에도 절대 휘말리지 않으리라. 주문처럼 되새기는 말 사이, 맑은 눈동자가 요망하게 토시로를 비추었다. 새붉은 입술이 다시금 벌어졌다.

 

“이 안에 무슨 선물이 있을지 궁금하지 않나?”

 

또한, 토시로의 입술이 악물리는 시간이었다.

 

 

 

볼품없이 휘말렸다. 정사 후 몰려오는 피로에도 끝까지 잠들지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까닭은 제 자신이 욕망에 얼마나 휘둘리는가에 대한 한탄이었다. 눈을 돌리면 코타로가 진한 잠에 빠져 있었다. 곧게 칠해진 마스카라는 여전히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었으나, 립글로즈만은 형색을 지우고 흐트러져있었다. 반사적으로 제 입술을 혀로 훑은 토시로가 달콤하게 퍼져오는 라즈베리 향에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코타로의 깊은 잠은 고르지 못한 숨을 내쉬었다. 엇박자 숨소리도, 꿈에서마저 긴장을 놓지 못한 눈매도. 단지 무향으로써 그의 담백함을 부각시켰던 체취가 어느 기생의 행색마냥 어우러졌을 뿐, 평소와 진배없었다.

 

토시로가 그토록 그만 두겠다 청했던 ‘평소’와.

 

서로의 몸이 맞닿는 잠시나마 지긋한 관계를 잊고 욕망에 온 신경을 맡겼던, 어리석고도 욕정적이던. 퇴보된 욕망의 파트너 관계. 토시로와 코타로를 잘 수식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적어도 토시로에게는 짙어지는 본능과 감정을 바로잡기 위해서 이 이상의 관계는 없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는, 코타로는 사회가 정의한 악(惡)이니까.

 

토시로가 관계를 끝내자 말했을 때 코타로의 눈에서 느껴지는 아쉬움은 절대적 본능에 의한 욕망에서 분출된 것이었다. 코타로는 평소의 관계를 원했고, 토시로는 그때마다 서로의 관계를 확인시켜주는 말을 했다.

 

‘이렇게 잘 느끼는 몸으로는 내가 언제든 널 체포할 수 있겠군.’

 

불과 몇 시간 전에도 분명 토시로는 서로의 관계를 확인시켰고,

 

‘자네야말로 그런 얼굴로는 내가 언제 널 베도 모르겠지. 물론, 난 그런 실력도 있고 말일세.’

 

코타로는 그 대답으로 토시로의 감정을 확인시켰다.

 

당장 옆에 잠든 코타로를 지긋이 응시했다. 커튼에 가려 확실치 않지만, 창밖에는 눈이 내렸고 그를 증명하듯 코타로의 입에선 간헐적으로 하이얀 입김이 퍼져나왔다. 안개를 연상시키는 그의 입김은 창백한 얼굴빛과 어우러졌다. 흡사 시체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네가 준비한 선물이 뭔데?’

‘아직도 눈치 못 채겠어? 넌. 뭘 갖고 싶기에.’

‘가능한 네 목이면 좋겠군.’

 

적어도 이 사회에서 그의 목숨 가치를 환산하자면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수 있겠지. 코타로는 그런 존재니까. 토시로는 생각했다. 그럼 나에게 네 죽음은 크리스마스의 선물이 될까, 악몽이 될까. 널 처리하는 게 사명인 나로서는 당연히 선물이 되겠지. 그렇다면…… 가느다란 목에 손을 뻗었다. 그렇다면, 당장 널 죽일 수 있는 이 상황은 선물일까, 악몽일까. 전자와 다르게 그 무엇도 생각할 수 없다. 판단력이 눈보라에 가려졌다. 그러나 단지. 오늘은 별 없는 기적마저 찾아오는 크리스마스고, 난 더 욕망에 휩쓸리지 않을 터이니.

 

잠잠하던 코타로의 몸에 조금씩 파동이 생기기 시작했다. 벌어진 입에서 버거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목을 쥔 손은 하나가 들어났다. 아까 전 코타로가 그리하였듯, 코타로의 허리 위에 올라타 두 손으로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한 가냘픈 목을 쥐어짜고 있는 꼴은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캐럴이 귓가를 장식했다. 하이템포로 울리던 노래는 코타로의 얼굴이 구겨질수록 소스테누토sostenuto라도 달린 듯 느리게 와 닿았다. 결국에는 정갈하게 끊긴 박자 소리만 선명히 들리는데, 심전도를 연상시키는 2/4박자 비트는 이제 그만 하라는 일종의 경고 같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코타로의 얼굴은 평소보다 창백해 파랗게 오를 지경이며, 헐떡이던 숨은 그조차 버거운지 무음으로 변하였다. 그럼에도 코타로는 여전히 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코타로에게서 흘러나온 식은땀에 토시로의 손가락 위를 타고 흘렀다. 마침내 제 손 아래서 악을 나누어주던 산타가 사라지고 있다. 산산조각과 같이.

 

번뜩. 토시로의 손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조금 들렸던 코타로의 고개가 가벼운 소리와 함께 베개 위로 떨어졌다. 주춤하면서도 빠르게 코타로의 위를, 침대를 벗어나 욕실로 향했다.

악을 죽이며 발기하는 자는 얼마나 더 추악하고 최악이란 말인가.

 

주변에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한 코타로가 게슴츠레한 눈을 떴다. 미리 준비해두었던 일상복으로 갈아입고서 등이 켜진 욕실을 흘깃 보았다. 목이 뜨겁게 지끈거리는 걸 보아 쉽게 지워지지 않을 멍이 토시로의 손모양을 본떠 크게 자리 잡았을 터이다. 엘리자베스나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긴토키에게 성가신 질문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대답을 피하면 크게 관심 가지진 않을 테지만― 침대 머리맡에 놓인 채도 낮은 분홍색 목도리를 둘렀다. 아마 어느 기생이 토시로에게 선물이랍시고 보냈을 구애겠지만 준 사람이 화냈으면 화냈지, 토시로가 왜 가져갔냐며 따지고 묻진 않을 것이다. 선물의 존재마저 잊었으면 몰라도.

 

창문으로 몸을 빠져나간 코타로가 아직 힘이 제대로 들지 않는 정신에 제대로 착지하지 못해 미끄러졌다. 욕실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쿵 소리와 빈 침대에 창문 밖을 확인 할까 말까 고민하던 토시로는 끝내 깊은 악몽에서 깨듯 기방을 박차고 나갔다. 담배보다 라즈베리 맛 사탕이 더 당기었다.

 

 

 

‘그래서 네가 준비한 선물이 뭔데?’

‘아직도 눈치 못 채겠어? 넌. 뭘 갖고 싶기에.’

‘가능한 네 목이면 좋겠군.’

‘말했지만 넌 솔직하지 못해. ……그래. 내 목이 네게 최고의 선물이 된다면야, 마다할 이유 없지. 날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줄게. 선택은 네 몫이야. 정말 내 목숨을 가져가는 게 간절하다 생각되면 네가 가져온 검으로 날 베도 좋아.

하지만 그렇게 생각되면서도 날 죽이지 못한다면…….’

‘내 패배인가?’

‘패배라니. 애초에 우리에겐 승리라는 개념이 없었지. 단지, 만일 결국 네가 날 죽이지 못한다면 선물은 내가 받는 쪽이 되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넌 무슨 선물을 원하는데.’

 

자꾸만 흘러내리는 목도리를 단단히 목에 묶은 코타로가 자리에 우뚝 섰다. 거리 중앙을 장식한 거대한 트리를 올려다보았다. 깃털 같은 입김과 함께 새어나온 건 경소였다.

 

‘글쎄. 적어도 네가 날 죽이지 못하는 그 순간이 내겐 선물이겠지.’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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