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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츠라타카] Bohemian Rhapsody

W.소몽

 

 

 

 

****

 

 

[ 열번째 메리 크리스마스, 긴토키. ]

 

네 편지는 매년 같은 말로 시작한다.

올해가 내가 네 곁을 떠난 후의 몇 년째가 되었음을, 지금 문밖을 나서면 나를 맞는 계절이 겨울임을, 그리고 네게 기억되고 있는 내 이름이 무엇임을, 나는 네 편지로 새삼스레 기억해낸다. 여러가지 당연한 것들이 크게 의미가 없어진지 꽤 오래 되었다. 그런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편지를 시작하는 너의 말은 나의 1년이 또 끝나감을 알린다.

 

" 너도 참 어지간하다. “

 

편지를 내밀며 타카스기는 언제나와 같이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다. 이 또한 매년 변하지 않는 모습이다. 모종의 방법으로 작은 부분만 수정한 영화필름을 매년 재상영이라도 하는 기분이다.

 

" 민폐도 적당히 끼쳐아지. "

" 1년에 한번은 고생 좀 해라. "

" 답장을 하던지. 아니면 주소나 연락처를 알려주던지. "

" 그럼 걔는 맨날 편지 쓸 걸. 너한테 실례라서 1년에 한번 쓰는 걸로 그치는 거지. "

 

너의 편지가 내게로 오는 경로는 꽤 복잡하다. 너는 언제나와 같이 찍어낸 듯 반듯한 글씨로 편지를 쓰고, 타카스기는 주소칸이 하얗게 빈 편지를 넘겨받는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편지는 찬 겨울바람을 품고 내게 도착한다. 그래서인지 처음 네 편지를 받아들었을 때는 머릿속을 예리한 바람이 파고들기라도 한 것처럼 현기증이 났다. 매년 이 편지를 쓰는 네 모습이 마치 보기라도 한 것처럼 생생히 보인다. 늘 같은 펜과 살짝 낡은 듯한 종이. 네 편지는 항상 같은 향이 나서 내 겨울은 늘 그 향으로 차있다. 그러나 반항이라도 하듯 매년 겨울, 네 편지가 도착할 무렵의 나는 항상 독한 감기에 걸려 향은커녕 숨조차 쉬기 어려운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은 일종의 우스운 아이러니이다. 지금도 칼칼하게 막혀오는 목으로 헛기침을 하며 시린 공기를 가늘게 들이마시기만 한다.

 

" 어제 제대했다며. "

" 누가 네 놈 마음대로 내 집 의자에 앉으래? "

" 손님을 세워놓지 않는다는 예의 정도는 걸음마 땔 적에 배워야하는 거 아니냐, 긴토키. "

" 그러게. 앞으로는 기어다녀 볼게. "

" 염병할, 말하는 꼬락서니하고는. “

 

타카스기는 제 집인 냥 2인용의 작은 식탁 옆에 놓인 의자를 끌어다 놓곤 털썩 주저 앉아 담배를 꺼내어 문다. 하나 받으라는 듯 담뱃갑을 내밀기에 간만에 나도 한 개피를 물고 불을 붙인다. 따가운 담배연기가 오랫 만에 몸 깊숙이 파고들어 흐린 연기로 빈 공간을 채운다.

 

" 알고 때 맞춰 온 거 아니냐? "

"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왜 네 녀석 때문에 수고스럽게 때 맞춰 오겠냐. "

" 자위대 정보는 기밀인데 네 놈은 귀신같이 잘 알아내더라? 내 집도 그렇고. 개인정보를 무단으로 캐는 건 불법이에요. 특히나 군 관련된 정보는 군법에 저촉돼서 큰일난다? "

" 뭐, 더 잃을 것도 없고. 원래 떳떳하지 못한 놈의 정보는 떳떳하지 못한 놈이 제일 잘 알아내거든. “

 

눈을 껌뻑이며 슬며시 살핀 녀석의 외눈에 아무런 동요도 일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이 흘렀음을 가끔 예키치 못한 데에서 실감하곤 한다.

그럭저럭 우수한 경찰의 젊은 신참으로 살아가던 우리가 서로 돌아선 것은 내가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였다. 아마 돌아가셨다기보다는 살해되셨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살해의 당사자가 그런 어휘를 쓰기엔 마치 제3자와 같은 거리감이 있어 그러고 싶지는 않다. 선생님은 '나로 인해' 돌아가셨다. 정확한 표현은 이것이 맞으리라.

총알 하나만큼 가벼워진 권총을 든 채 너와 녀석을 보았을 때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임을 알았다. 녀석은 잃은 한쪽 눈에서 붉은 눈물을 쏟고 있었고, 너는,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쏟아지듯 드리워진 머리칼 사이의 네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분명 울고 있었겠지만 그 때 울었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물을 기회도, 자격도 없었다.

타카스기는 그 일 이후 종적을 감추었고 너는 경찰에 남았으며, 나는 자위대에 입대했다. 녀석이 뒷 세계에 몸담았음을 알게 된 것은 입대 후 처음으로 맞은 겨울, 너의 편지를 가져온 녀석의 하수인에 의해서였다. 녀석의 얼굴을 다시 본 것은 그 이후로도 몇 년이 흐른 뒤였다.

네가 경찰에 남은 이유를 지금껏 이해하기가 어렵다. 너는 항상 이해하기 어려웠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나는 죽으려고 입대했다.

 

나의 이유를 기억속에 새겨둔 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처럼, 너도 누군가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을테다. 다시 너를 만나도 이 이유는 말하고 싶지 않다. 넌 머리가 좋으니까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2등 육조(일본 자위대의 중사 계급)정도 됐으면 하산할 때도 됐지. "

" 답지 않게 꾸준히도 진급했네. "

"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정신차려보니 너무 올라왔더라고. "

" 이제 어쩔 생각이야? "

" 어떻게든 숨만 붙어 있음 살 길을 찾겠지. "

" 한심한 새끼... 가서 살 곳은. "

" 이쪽 집은 일주일 내로 다 정리하고 도쿄로 가려고. 가서 찾아볼게. “

 

불만스럽게 토해져 나오는 담배연기가 실내를 가득 매운다. 네가 봤으면 꽤 소란스러웠을 장면이지만 어찌되었건 너는 여기 없으니 됐다. 이제 모두 정리 되었다고. 하고자 했던 것을 또 포기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시 너를 향해 돌아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지기만 한다. 아직도 나는 내 업에 눌려 있나보다.

 

" 즈라말이야. "

 

네 이름이 들리자 녀석의 외눈이 느릿하게 나를 향한다.

 

" 아직 날 기다려? "

 

담담한 목소리로 이 말을 읊는 내가 신기하다. 기다리지 않았으면 하면서도, 네가 기다릴 것을 알아서. 그래서 항상 물어보지 못했다.

답을 알고 싶지 않았다.

 

" 편지를 빤히 손에 들고 그 말이 나와? "

"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냐."

" 십년동안 답장한번 안해 놓고는 기다리냐는 질문이 그렇게 쉽냐? "

" 변한 건 없이 여전하고? "

" 나도 몰라. "

" 네가 모르면 누가 아냐, 타카스기. "

" 개자식. "

 

녀석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는다.

예전 같았으면 주먹이라도 날아왔을 텐데 그러지 않는 것을 보니, 나도 녀석도 너도, 나름 나이를 먹어서 조금의 철이라도 든 모양이다. 담배를 들어 다시 한번 깊게 연기를 들이마신다.

 

" 역시 너 같은 놈 좋으라고 즈라 녀석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어. "

 

꽤나 듣기 싫은 의자소리를 내며 녀석이 일어나 문을 향한다.

이사가면서 새 의자를 사야지 하는 별 볼 일 없는 생각을 한다.

 

" 가냐? "

" 그래. "

" 좀더 쉬다가지. "

" 볼일도 끝났는데 네놈 면상을 더 오래 볼 이유는 없잖아. "

" 길 미끄러우니까 미끄러지지 말고- "

" 내가 네놈인줄 아냐. "

 

문이 열리고 녀석의 낮은 목소리는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작은 한숨을 내쉰다. 그게 녀석이 나 대신 자조해주는 것 같아 작게 웃어버린다.

뭐가 좋다고 웃어-라는 작은 읊조림이 들린다.

녀석의 목소리인지는 잘 모르겠다.

 

" 즈라는 널 아직도 기다리고 있어. "

" 쓸데없이 미련한 건 여전하네. "

" 네 놈이 흘려보낸 시간에 대해 피눈물 흘리면서 후회하길 바라. 그리고 즈라랑, 눈물나게 행복하기를 바라. “

 

문이 천천히 닫히고 순간의 그 시간이 꼭 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을 받는다.

아무것도 변치 않으리라는 예감. 또 다시 실패할 것이라는 불안감.

그렇지만 아직도 불안정한 나의 모습을 딛고, 다시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즈라.

 

분명 너는 나를 용서했겠지.

네 편지가 찾아오는 이 날이 비롯된 종교는 용서와 사랑을 하랬으니까.

너는 이 편지들을 쓰면서 스무번의 성탄을 거쳐, 스무번 나를 용서했을지도 모르겠다.

용서라기보단 모든 눈물을 스무장의 종이에 분산시켜 별다른 말 없이 나를 축복하며 나를 원망했을지도.

그래서 옅어진 원망을 용서라고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너는 항상 편지에 아무말도 쓰지 않았다. 그저 인삿말 뿐.

그렇게 네가 너의 말을 종이에 써내리지 않고 품어왔 듯 나 또한 너에게 할 말을 품은 채 아무렇지 않은 인사를 할 것이다.

 

굼뜬 동작으로 의자에서 일어난다.

탁자 유리 위에 아직 다 타지 않은 담뱃불이 서서히 타들어가고 있다.

그 것 때문에 눈이 매워,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 한다.

 

즈라, 들었어?

이번 성탄에는, 눈이 내릴거래.

 

 

 

 

****

 

 

타카스기는 내게 굳이 특수경찰로 지원해야겠냐고 했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어조였지만 있는 대로 구겨진 미간을 보고 그가 내 선택을 진심으로 싫어함을 알았다. 그는 늘 표현이 서툴어서 긍정적이지 않은 감정들은 모두 불쾌한 듯 표현하곤 했다. 그가 내게 던진 질문은 짧지만 무거웠고,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미 마음을 정한 참이었다. 시간을 들여 공들여 내린 결정을 쉬이 바꾸지 않는 것은 내 장점이자 치명적인 결점이기도 하다.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꽤 오래 생각했다.

한참을 그 주제로 생각을 하다 보니 어찌되든 좋다는 안일한 결론이 나왔다.

내가 정말 궁지에 몰리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우고 정리할 계기가 필요했다. 네가 사라진지 딱 1년이 되어가던 겨울이었다.

 

찬 겨울바람이 두꺼운 외투를 파고들어 겉옷이 무용지물이 될 즈음의 시기.

형형색색의 불빛들이 거리를 밝히고 그 빛에 내가 잠시 눈을 뜨지 못했을 때.

울려퍼지는 경쾌한 음악소리에 너의 떠나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때.

네가 떠나던 시기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후 성탄을 기념하는 말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다. 그래봐야 고작 주변사람들에게 한 번의 인사를 건내지 못했을 뿐이다.

아무도 그런 사소함을 알아채지 못할 테지만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일처럼 다가온다.

너에게로 향하는 편지를 잔뜩 써서 타카스기에게 주었다. 총 열통이니 아마 십년간은 문제 없을 것이다. 파견되면 아마 편지 같은 거 못할 테니까. 그리고 네가 어디있는지도 모르니까. 좀 전해달라고. 매년, 딱 한번만. 성탄을 구실로 내 별 볼 일 없는 인사를 너에게 건내어 달라고.

그렇게 말하니 뭐하자는 거냐며 녀석은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겨우 참아내는 것처럼 보였다.

녀석을 지키고 싶었는데,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렇게 잔인하게 포기하게 해야만 했다. 그런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나는 지쳐있었다. 모두가 다치지 않을 방법이 나는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답은 어디에도 없었나보다.

 

떠나던 날에 타카스기를 만났다.

자신으로는 안되냐고. 그렇게 물어왔다.

누구로도 안된다고 대답했다. 정말 누구로도. 너도, 타카스기도.

이 문제는 오롯이 나의 문제이니까, 내가 끝내야한다고.

문제조차 알지 못한 채 나는 답을 찾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로 작별을 했다.

 

새해가 도래하기 7일 전에 구세주가 나타나 인간을 구원했다고 한다.

왜 하필 새해의 정확히 '7일 전'일까. 내년이 되기 전에 구원이 찾아오니 앞으로 다가올 날을 기다리란 의미로 25일을 그의 탄생일로 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수도 신화의 일종이니 정말 12월 25일에 그가 태어난 것이 사실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찌되었건, 성서의 구세주가 사실이라면 결국 기원후 n년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본디 구원받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구원받은 삶을 살면서 또 다른 구원을 얻고자 허우적대는 인간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것은 꽤나 머리 아프면서도 흥미로운 일이다. 관찰 대상에는 너와 녀석뿐만 아니라, 나 또한 당연히 포함되어있다. 사실은 가끔 눈물이 치밀어 오를 때도 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우리가 받은 구원은 서로의 존재뿐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하곤 한다.

 

긴토키.

오만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너를 이해한다.

떠나기로 결정한 지금에서야 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네 떠나는 발걸음이 무슨 의미였는지,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편지에 써넣고 싶은 울음이 너무 많은데, 편지는 이미 내 손을 떠나 이미 내년과 후년, 그리고 그 이후의 너에게 도착해 있다. 나는 그렇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십년의 시간을 네 곁에서 보내게 되리라.

 

구원이란 무엇일까, 긴토키.

우리가 서로의 구원이라면 나는 나의 구원을 움켜쥐기 위해서 너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너는 죽으러 떠났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너 대신 죽어서 너를 완전히 이해하리라.

육체적으로 죽지 못한다 해도 정신적으로 죽어서, 나는 너와 가까워지겠다.

인간의 구원은 인간일 수 없다. 그러면 인간은 신이 되고, 인간은 그런 존재가 될 수 없다.

긴토키, 너는 내 구원이어서는 안 된다.

내가 너에게 또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의존하게 되는 것은 죽어도 싫다.

 

분명 네게 안겨 지금껏 참은 울음을 토해내며 꼴사납게 울 것이다.

나는 다시는 네게 구원받지 않을 것이다.

올해의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종이에 담지 못한 내 말이 너에게 전해지기를. 사실은, 그러지 않기를.

언제나와 다름없이 차갑게 스쳐지나가는 겨울이 너에게 축복이 되기를.

올해의 내 편지는 이렇게 쓰인 채, 또 보내지 못하고 사라진다.

 

두번째 메리크리스마스, 긴토키.

 

그저 이 한문장만 쓰인 채.

 

 

 

 

****

 

 

긴토키의 집을 나서며 하늘을 보니 벌써 해가 져버렸다.

들어설 때는 분명 밝았는데. 시간은 놀라우리만큼 빠르다.

집 안에서부터 피우던 담배가 이제야 다 타서 바닥에 던지곤 발로 밟아 끈다.

올해도 너의 잔인한 임무를 나는 끝내었다.

다시 이런 일 시키기만 해봐, 두들겨 패줄테니까.

 

옷 사이를 파고드는 겨울 바람에 코트 깃을 세워 얼굴을 묻는다.

남쪽으로 왔는데도 바람이 너무 차서 조금 의외다 싶다. 역시 겨울은 겨울인가보다.

마지막으로 널 봤을 때도 이런 찬 겨울이었다. 머리칼을 자르고 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너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아서, 외눈을 두어번 씀벅이고 나서야 또렷이 보였다. 술자리가 숨이 막히긴 그 날이 처음이었다.

이렇게 술맛이 없을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술잔만 연거푸 비웠다.

마지막 인사를 하며 네가 내민 상자는 아직도 가지고 있다.

 

혹시라도, 내가 돌아오지 못해도 너는 나를 기억해줄테니까.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더니, 그리 말하며 너는 웃지 말았어야했다.

그러지만 않았어도 나는 네 앞에서 꼴사납게 울지는 않았을 텐데.

네가 남긴 상자 안에는 긴토키에게 보내는 수많은 편지와 네 일기장이 들어있었다.

일기장은 수 백 번 읽어서, 이젠 잉크색 마저 바래버렸다.

이렇게 읽지 못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사진이라도 찍어놓을 걸 그랬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차라리 글자가 사라져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조만간 텅 빈 상자와 함께 태워버리려 한다.

 

거짓말을 했다.

녀석의 얼굴에 옅은 희망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얼굴에 침을 뱉으며 욕지거리를 잔뜩 내뱉고 싶은 마음을 겨우 눌러 참았다.

너는 내가 누구에게든 거짓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싫어하다 못해 혐오했다.

네 녀석은 긴토키를 기다릴 것이다. 처음부터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10년이 아니라 20년, 30년이 지나도 넌 녀석을 기다릴 것이다.

그것만큼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녀석이 후회하길 바란다는 것도 진심이었다.

 

다만 녀석이 행복했으면 한다는 것은 명백한 거짓이었다.

거짓이기에 앞서 허구였다. 나는 녀석에게 허구를 가능성처럼 포장하여 아름다운 성탄선물인 것 마냥 주었다. 내 선물이 녀석을 서서히 죽일 흉기가 될 것이다. 녀석은 행복할 수 없다. 후회만 하게 될 것이다. 내가 파고드는 눈물을 삼키며 후회하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넌 나를 비난할 수 없다. 즈라, 넌 내게 그래서는 안 된다.

너는 나를 짓밟았고 그럼에도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내 사랑이 끝났음을 알면서도 나는 미련해서, 너의 사랑을 위해 나의 그것을 희생했다.

돌아오는 대가를 바라고 한 희생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넌 나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내가 너를 미워하고 싶었던 시간들.

너는 그 모든 시간에 홀로 죽어야 했던 나를 다시 난도질해 도륙을 낼 수 없다.

 

네가 있는 곳에 잠입해 있던 부하 하나가 네 소재지를 알려주었다.

네가 특수 경찰이 되어 연락이 끊기고 삼 년차 되던 해였다.

그곳에서 나는 간만에 너를 보고 너무 기뻐서 죽고 싶을 정도로 울었다.

부하 녀석은 내게 네가 살아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널 위해 울지 않았다.

나를 오래도록 울리려거든 너는 적당히 잔인했어야했다.

나는 그 때 죽어서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는다.

 

긴토키의 아파트를 내려와 대기하고 있는 차에 올라탄다.

예전에 네가 이 차를 보고 출세했다며 웃었던 기억이 나서 조만간 바꿀 생각이다.

이렇게 비참한 것이 출세라면 나는 출세하지 말걸 그랬다. 너에게 떳떳하지 못한 인간이 되어 겨우 네 부탁이나 들어주는 것으로 그에 대해 사죄하는 것이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면.

차라리 아팠던 날들에 네 곁에서 잠시 쉬어갈걸 그랬다.

 

의자에 몸을 뉘인 채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다 눈을 감는다.

잠시, 너에게 들러서 내가 너의 숙제를 끝냈음을 말하고 갈 것이다.

그리고 들려오지 않는 너의 웃음을 들으며, 정말 오랫만의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너를 완전히 보내볼 것이다.

 

눈을 감기 전 눈꺼풀 뒤에 새겨지듯 박힌 화려한 장식용 전등 빛이 사라지지를 않아서 아프다. 정말 다시, 또, 크리스마스구나.

 

너의 멈춘 시간의 여덟번째 크리스마스를, 진심으로, 축복해.

 

메리크리스마스, 즈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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