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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츠라]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부제: 제발 왔으면 좋겠다.

 

W.비밀(悲謐)

 

내가 미쳤었지. 왜 그런 말을 해서는. 텔레비전 속의 아나운서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눈 소식이 없음을 알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니라는 소식이 아쉬운 것은 비단, 뛰어 노는 것을 좋아하는 어린 아이들 뿐만은 아니었다. 굳이 아쉬운 편이냐고 물으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눈도 크리스마스도 좋아하는 편이 아니니. 눈이 내리면 들뜨기보다 치울 걱정을 하는 편이었고, 크리스마스는 어딜 가나 사람이 붐벼 꺼리는 쪽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전부 말미잘같은 타카스기와 즈라 때문이었다.

 

‘지친다 지쳐. 그냥 큰 맘 먹고 딱 고백하라니까?’

‘쉽게 말하지 말라고.’

‘누가 쉽게 말한댔냐.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운명이다 생각하고 눈 딱 감고 고백해. 어짜피 크리스마스 때 즈라랑 약속있잖아 너.’

 

아니, 이건 타카스기 때문인가. 학교에서 잘 자던 사람을 흔들어 깨웠던 건 같은 반인 말미잘1 타카스기였다. 물론, 말미잘2 즈라는 사카모토를 괴롭혀댔겠지. 말미잘1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덥지 않은(즈라가 자길보고 웃어줬다던가, 체육시간의 즈라가 너무 예뻤다던가, 하는 정말로 사소한) 일에 사랑에 빠진 소녀, 아니 소년처럼 웃었다. 그게 어울리는 얼굴이었으면 이런 말도 안 했을 것이지만, 자다 깨서 바로 본 얼굴이 살벌하게 생긴 남자 고등학생이 (키는 작다지만) 웃고 있는 것인 건 누구라도 썩 유쾌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어지간히 알아서 하겠지. 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것도 한 두 해 정도지. 이 말미잘 똥같은 놈들은 서로 짝사랑하면서 서로 자기를 좋아할 리 없다며 삽질만 근 6년 동안 죽어라 삽질만 해대고 있었다. 둘만 속 앓이하고 있었으면 신경도 안 썼을 것이지만, 그놈의 십년지기가 뭔지 둘이서 번갈아가며 고민 상담을 빙자한 고구마 공장을 쏟아낸 탓에 사이다를 아무리 마셔도 속이 꽉 막힌 느낌에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었다.

 

아, 그냥 크리스마스에 고백하라고만 할 걸. 왜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이라는 조건을 붙여서는. ......기우제라도 지내야하나?

 

안 그래도 제멋대로 뻗친 머리를 헤집었다. 벌써 내일이 크리스마스... 아, 열두시 지났네. 오늘이 크리스마스라니, 이게 다 말미잘들 때문이다. 내 소중한 방학의 3일을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지 말지만 생각한 건 다 말미잘 탓이다. 그렇다고 신경을 끄자니 강제로 고구마를 먹은 기억만 몇 년이던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고백하라고 어떻게든 만들어 놓으면 뭔가 사건이 터져서 무산된 것도 한 두 번이 아니다.

 

하느님, 진짜 계시면 이번 크리스마스에만 눈 내려주시면 안돼요? 그러면 저 진짜 교회 열심히 다닐게요.

 

-

 

하늘은 내 편이 아닌가봐. 더럽게도 맑은 하늘이 아침을 반겼다. 아침형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그 망할 말미잘들 중 하나가 새벽부터 활동하는 인간인데다, 하나도 그리 늦게 일어나는 편이 아니어서, 아마 오전에 약속을 잡았겠지. 고백이 성공할 지 안할지 따라다녀야 하는 내 입장도 생각해 달라고. 망할 말미잘들. 도대체 아침부터 밤까지 할 일이 뭐가 그리 많다고. 오전에 약속을 잡는 거람?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외투의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어차피 밖에는 죄다 똑같은 검정색 패딩이니 들키지는 않겠지. 말미잘2의 성격상 들키면 그 사이에 합류를 시킬 거니까. 그건 죽어도 사양이었다. 말미잘1의 눈초리도 짜증나고, 무엇보다 무의식적으로 유사연애 중인(의식적인 게 아니라는 게 더 짜증난다.) 말미잘들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바에야 차라리 몰래 가는 게 나으리라. 이왕 나가는 김에 다른 사람이라도 불러 같이 라도 갈 걸 그랬나? 아니, 죄다 시끄럽거나 눈에 튀는 놈들뿐이었지. 내 주변인들은 어디서부터 글러먹은 건지 원.

 

-

 

광장에서 말미잘1과 2가 만났다. 얇게 입은 말미잘2에게 자기가 차고 온 하늘색 목도리를 선뜻 내어주고 영화나 보러 가자며 이끄는 말미잘1의 모습은 누가 봐도 말미잘2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말미잘2는 너는 정말 상냥하네.(말미잘1과 이보다 안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라며 감탄을 표할 뿐이었다. 그게 끝이면 좋으련만, 영화관, 카페, 상가, 서점 등을 발발 돌아다니며 끝도 없이 한 쪽은 좋아한다는 티를 내고 한 쪽은 우정이야.라고 생각하는 (십년 정도 보다보니 안 봐도 비디오였다) 멍청한 짓을 반복하는 것에 고구마를 먹다 못해 뱉어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저것들은 왜 서로 좋아한다고 하는 말을 들어줄 생각도 안 하는 걸까. 제발 삽질 좀 그만하면 안 될까.

 

말미잘 커플은 한참이나 싸돌아다니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광장 중앙에 장식된 거대한 트리 아래에 앉았다. 즐거웠다며 웃던 말미잘2가 말미잘1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선 걱정 어린 물음을 던졌다.

 

‘타카스기? 표정이 안 좋네. 괜찮아? 미안, 너무 많이 돌아다녔지?’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아, 설마 눈 안 온다고 고백 못해서 저러는 건 아니지? 긴상이 눈 내리면 운명이라고 해서 눈이 안 내리면 운명이 아닌 걸로 결론짓고 그러는 거 아니지?

 

말미잘1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즈라,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응, 말해 봐.’

 

말미잘1은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덩달아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긴토키가 그러는 데,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너랑 운명이래.’

 

거기서 왜 날 걸고 넘어지냐 망할 말미잘같은 타카스기. 눈이 안 와서 그래? 아오 씨... 내가 하느님 설득 못시켜서 미안하다 그래.

 

‘이렇게 잔뜩 흐린 하늘이고, 날씨도 엄청 추운데. 눈은 결국 안 오는 걸 보면 너랑 내가 운명은 아닌가 봐.’

 

아악, 똥같은 말미잘 자식! 제발 그 입 좀 다물라고! 즈라 동공 흔들리는 건 안 보이냐?

 

‘그런데. 나 내가 네 운명이 아니라도 너 좋아해. 정말.’

 

입 다물어 제ㅂ... 어, 뭐라고? 말ㅁ... 아니 타카스기 고백한 거 맞아? 드디어 그 삽질 안 봐도 되는 거 맞아?

 

‘나 이만 가볼게. 즈라. 못 데려다 줄 것 같아.’

‘... 나도 좋아해, 너’

 

즈라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타카스기를 붙잡았다. 둘 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눈을 마주쳤다. 말미잘같은 것들. 내가 이어주려고 별 짓을 다하긴 했는데 둘이서 입 맞추는 걸, 그것도 공공장소에서 당연하게. 보고 싶었던 건 아니거든? 처음으로 이어주길 잘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사귀기 시작하자마자 이 난리를 치는 데. 앞으로 대놓고 이 애정행각을 할 말미잘들을 생각하니 배알이 꼴렸다.

 

여차하면 뿌려보기라도 하려고 사온 눈 스프레이를 깊은 주머니에 쑤셔놓고 발을 옮겼다. 십년지기 둘이서 깊게 입맞춤하고 있는 건 더 이상 보고 싶지도 않았다.

 

으으, 춥다. 앗, 차거워.

 

코 끝에 닿은 얼음송이가 차가웠다. 내려달라고 할 땐 그렇게 안내려주더니. 내릴 필요도 없어지니 내리는 것 좀 봐. 많이 오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눈 치우기 힘드니까.

 

더럽게도 힘들기만 했던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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