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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츠라]처음이자 마지막 크리스마스

 

W.화온

(BGM: https://www.youtube.com/watch?v=FSE7M2z_pAs)

 

정신이 어렴풋이 들었다. 방 안이 아직 환하지 않은 것을 보니 새벽 같다가도, 지금이 겨울이라는 자각이 든 후에는 채 뜨이지도 않은 눈으로 시계부터 찾았다. 손을 뻗어 머리맡을 더듬자 차게 식은 금속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자명종 시계를 들어 얼굴에 가까이했다. 평소 기상 시간보다 이 각(刻) 정도 이른 시간이었다.

기다리던 자는 어젯밤에도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은 듯했다. 가지런하지 못한 채 걸려 있는 옷이 어제와 다를 바 없다는 점이 그 근거였다. 평소 깔끔하고 단정히 사는 사람이니 저런 것을 보면 가만히 두지 못할 테니까. 제가 옷을 가지런히 걸어두는 법을 모르지는 않았다. 단지 그가 다녀갔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함이었다. 오늘 밤이 지나고도 저대로라면 내일 아침에는 주름진 곳 없이 다시 걸어두어야 할 터였다. 구겨진 옷을 입고 다니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 생각을 끝내고,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정신을 가다듬자니 문틈으로 한기가 든 것인지 등골이 서늘했다. 온풍기를 마련해두었다고는 하나 워낙 오래된 목조 저택이라 방풍에 취약한 탓이리라. 그렇다고 당장 새 거처를 찾아 나설 수도 없었다. 큰 전투가 끝난 후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이 나라에 제대로 남은 건 몇 되지 않았다. 건물이나 사람 가릴 것이 없었다. 몸 누울 곳이라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터였다. 타카스기는 차라리 추위에 익숙해지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이불을 걷어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루 쪽으로 난 미닫이문을 열었다. 피부에 닿는 바깥의 찬 공기가 방 안이 생각보다 더 따뜻했다는 진실을 알려주는 듯했다. 춥다고 작게 중얼거린 말에도 입김이 하얗게 피었다. 아침 해가 서서히 빛을 발했고, 붉게 물든 하늘 앞으로 무너진 터미널이 보였다. 한창 보수 공사 중이라 파이프에 둘러싸인 모습이 영 갑갑해 보였다. 이내 기지개를 켜고, 오늘 할 일을 잠시 생각했다. 할 일이라고는 식재료를 사러 시장바닥에 나가는 것 외에는 없었다. 평화로운 날이었지만, 어딘가 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원해서 다 내려둔 것임에도 그랬다.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새 정권 수립에 대해 구 막부, 경찰, 양이지사, 몇 명의 민간인, 그리고 천인이 함께 의논하는 자리가 열렸다. 정치나 경제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간 이 시점에서 누가 모든 것을 이끌어 나라의 기틀을 다시 세울까에 대한 회의였다. 이견 없이 선출된 사람은 카츠라였다. 지식이 깊고 사람을 다루는 데에 능통하며 철두철미한 데에 그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자신도 거기에 이견은 없었다. 또한, 어렸을 적부터 그놈의 ‘리더’ 타령하며 모두를 이끄는 장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그의 꿈을 잊었을 리가 없었다. 그랬기에 드물게 목소리를 내어 가며 그를 지지하였지만, 타카스기는 얼마 전부터 그 일을 꽤 후회하고 있었다. 바빠도 이렇게까지 바쁠 줄은 몰랐다. 자신은 손이 비어 이제는 무얼 하며 하루를 보낼지에 대해 고민하는 삶에 자괴감이 들 정도였으니 말은 다 했다. 시간이 너무 남으니, 그 시간마다 하는 게 죄다 카츠라를 향한 생각이었다.

사실, 카츠라가 제게 다른 분야의 일을 함께 도와달라며 부탁을 해 왔지만 그걸 거절한 건 다름 아닌 타카스기 본인이었다. 제가 걸어온 인생이 아주 길지는 않았지만, 그 시간 내내 검을 잡아 사람이건 천인이건 가리지 않고 베어 이 세계가 무너지는 것까지 다 보았다. 허나 카츠라가 하려는 일은, 다 무너진 터 위에 새로운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제가 끝낸 일의 연장선에 있는 셈이었으니, 목적을 이룬 자신은 여기에서 손을 떼는 게 맞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타카스기는 인적 드문 에도의 외곽에서 이 집을 거처로 삼아 지내던 중이었다.

카츠라가 그런 중직을 맡았으니 얼굴을 못 볼 것은 이미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제가 버젓이 에도에 발을 딛고, 심지어 전과 달리 이제는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음에도 제 쪽에 걸음 한 번 않고, 전화 한 통 하지 않는 것은 조금 서운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자신이 한 짓을 생각하면 이런 소리는 꺼내둘 것도 못 되었다. 그에게 저는 한순간이 아니라, 늘 속을 썩이고 아프게 한 놈이었을 거였을 터였다. 그래서 꾹 참아 눌렀다. 해가 지나면 여유로워지겠지 하며 타카스기는 자신을 다독였다.

문득 새해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해보았다. 그러다 오늘이 며칠인지조차 모르겠다는 사실에 그는 얼이 빠졌다. 심지어 문을 닫고 벽에 걸린 달력을 보았어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사 두고 한 번도 틀지 않은 TV로 다가갔다. 콘센트에 코드를 꽂고 전원을 켜자 마침 아침 뉴스가 시작한 참이었다. 화면 상단에 적힌 날짜를 보니 12월 24일이었다. 무슨 날이었던 것 같긴 한데, 뭐였더라. 심각한 표정이 되어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답은 나오질 않았다. 지금 당장 알아내지 않으면 제가 궁금함에 죽을지도 몰랐는데, 이런 일로 누군가에게 연락하자니 평소에 하지도 않던 짓인 데다 체면이 안 살았다. 그렇다고 집에 컴퓨터 같은 걸 둔 것도 아니어서 타카스기는 마음을 비우고 씻을 채비를 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사람 많은 곳에서 하루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멍하니 살아서는 안 될 것 같다 싶었다.

 

 

 

* * *

 

 

 

수중에 변변한 교통수단이 없어 타카스기는 택시를 잡았다. 옷 하나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주제에 빈민가나 다름없는 에도 외곽에서 택시를 탄 게 신기하기라도 한지, 택시 운전사가 내내 백미러로 자신을 흘끗흘끗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 시선이 슬슬 거북해질 즈음 차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값을 치르고 타카스기는 차에서 내렸다.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운전사에게 별다른 인사는 덧붙이지 않았다.

한창 개점할 시간에 도착해서 그런지 거리는 예상보다 한산했다. 세상 돌아가는 꼴은 알아야겠다 싶어 나온 거리였지만 계획이라고는 하나 없었다. 그저 품 안에 읽을 책 한 권과 지갑을 챙겨 나온 게 전부였기에 어디라도 들어가야겠다 싶었다. 우선 그는 바로 앞 편의점 가판대에서 오늘 자 신문을 한 부 샀다. 에도가 전과 같았다면 당고 가게에 앉아 신문을 읽었겠지만, 제가 오늘 발을 들인 거리는 전부 신식(新式)으로 탈바꿈한 거리였다. 찾아본다면 일본식 찻집도 없을 리는 없겠으나 이 넓은 거리를 샅샅이 찾으며 돌아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큰맘 먹고 건너편에 보이는 서양식 찻집에 발을 들였다.

찻집에 들어서자 커피 향이 코를 감싸들었다. 커피를 종종 마시고는 했지만 이토록 갓 볶은 원두 냄새를 맡을 일은 없었기에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였다. 들어오기 전에는 원목을 많이 써서 따뜻한 느낌이 날 것 같은 외관이었는데, 막상 실내에는 반짝거리는 전구며 반짝이는 끈 같은 것을 잔뜩 달아놓은 내관에 타카스기는 잠시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런 걸 어딘가에서 본 것 같다는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어차피 들어오기도 했고, 주문하는 김에 직원에게 이것저것 물을 참으로 주문하는 곳에 섰다. 메뉴판을 올려다보고서는 빼곡한 가타가나의 향연에 그냥 나갈까 잠시 고민한 건 비밀이었다. 알아볼 수 있는 것 중 가장 나은 것이 녹차여서, 그는 그것을 주문할 생각으로 카운터를 보았다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주문하실 거냐, 해?”

“…….”

“…….”

“긴토키네 애송이.”

“애송이 아니다, 해! 그쪽도 키로만 따지면 애송이거든?”

“누가 애송이라고? 긴토키는 어딜 갔나.”

“나도 알고 싶다, 해. 아까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하더니 어디로 홀랑 가버렸다. 긴 쨩 보러 온 거냐, 해. 앉아 있다 보면 언젠간 나타날 건데.”

“그 녀석을 보러 온 건 아니었다만, 우연히 들른 가게에 너희가 있었을 뿐이지. 그보다, 그 심부름 센터는 어쩌고 여기에서 이러고 있나.”

“하고 있다, 해. 해결사 일로 여기에 있는 거니까. 하루만 카페 일 도와달라는 게 의뢰였거든. 그보다 엄청 오랜만에 보는 얼굴 같다, 해. 뭐어, 반갑다는 건 아니니까 착각은 마. 몇 달 만이냐, 해.”

“원래도 이렇게 쫑알쫑알 잘 떠드는 계집애였나. 긴토키 녀석이 심심할 일은 없겠군. 살가운 인사는 됐다. 꼬맹이. 주문이나 받아라.”

“치이. 말하는 건 긴 쨩이나 너나 다를 거 하나 없다, 해. 성격 개차반 같은 건 어떻게 둘이 똑같은지. 주문하시죠, 아저씨. 물론 네가 고를 수 있는 메뉴는 탄 커피콩으로 내린 에스프레소뿐이겠지만.”

“닮을 게 없어서 그 녀석을 닮았다니. 그놈이 데리고 사는 애니 당연한가. 녹차로. 따뜻하게.”

“칫. 이거 말고 더 필요한 건 없습니까, 해. 디저트도 있어요.”

“괜찮다.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뭐냐, 해.”

“애송이. 오늘 무슨 날이라도 있나.”

“오늘? 오늘 며칠이었냐, 해. 그냥 크리스마스 가까운 것밖엔 모르겠다, 해.”

“크리스마스?”

“응. 25일이 크리스마스다, 해. 오늘 24일 아니었나? 그럼 오늘은 이브겠다!”

 

아, 하고 타카스기는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서양에서 전래한 기념일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챙긴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어릴 적에는 서양의 기념일을 아는 사람이 더 드물었고, 더 자라서는 전쟁터에서 보냈으며, 전후(戰後)에도 그런 낭만은 뒤로 한 채 한 가지 목적에만 눈을 두고 살았다. 물 건너온 기념일은커녕 자국의 명절도 제대로 보낸 기억이 없었다. 그러니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들어도 그저 먼일처럼 느껴져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카구라에게 돈을 냈다. 카구라는 타카스기에게 영수증과 거스름돈을 내밀고 옆에 서 있던 아르바이트생에게 녹차 한 잔이요, 했다. 타카스기는 자리를 찾다가 흡연석 쪽으로 걸어가 해가 적당히 드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품에서 아까 샀던 신문과 제 곰방대를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다. 양식 찻집에서 곰방대에 불을 붙이는 것도 참 별난 일이다 싶어 헛웃음이 나오려던 찰나, 카구라가 쟁반에 주문한 차를 가져 왔다. 차 옆에는 설고(雪餻, 카스텔라) 두 쪽도 함께였다.

 

“빵을 주문하진 않았을 텐데.”

“그냥, 어떤 쑥스러움 많은 애가 네가 좋다고 가져다주라고 했다, 해.”

“뭐……?”

“나중에 딱 이만큼 술로 돌려주면 되는 거 아니냐, 해.”

 

타카스기는 몸을 돌려 카운터 쪽을 바라보았다. 쇼케이스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 뒤로 얼핏 보이는 백발의 곱슬머리를 가진 놈은 제 머릿속에 딱 한 놈밖에 없었다.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는 걸 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타카스기는 곰방대에 불을 붙이며 카구라에게 말했다.

 

“나이 먹고 안 하던 짓 하는 걸 보니 죽을 때가 가까웠나.”

“긴 쨩이 죽을 때 가까운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걸.”

“그건 그렇군. 꼬맹이. 가서 고맙다고 전해라. 다음에는 직접 가져오라고도.”

“너야말로 전하라고 하지 말고 직접 전하는 건 어떠냐, 해.”

 

카구라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떴다. 타카스기는 그제야 곰방대를 입에 물고 연기를 한 번 빨아들이며 신문을 펼쳤다. 가장 첫 면에 실린 건 다름 아닌 카츠라에 대한 기사였다. 한창 이런저런 개혁안을 내기 바쁠 때였으니 오늘뿐만이 아니라 하루가 멀다고 매일같이 1면에 얼굴을 장식하고 있을 터였다. 기사의 내용을 읽으려 했음에도 저절로 사진 속 그의 얼굴에 모든 집중이 쏠렸다. 안 그래도 마른 녀석이 더 마르고 수척해진 것 같아 영 신경이 쓰였다. 분명 세상 알자고 나온 자리이고 그래서 산 신문이었으나 내용은 읽는 둥 마는 둥했다. 생각 없이 페이지를 넘기자니 문화면에 큼지막하게 크리스마스 특집 기사가 실려 있었다. 연인에게 받고자 하는 크리스마스 선물 베스트 5 같은 걸 읽고 있자니 대체 이걸 왜 읽고 있나 싶다가도,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어느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과연 그가 제 행동을 반길 것인가. 확신은 서지 않았어도 예부터 제가 하는 일이라면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도 싫단 소리 한 번 않았던 그였다. 크리스마스를 챙기는 게, 우리에게 좋은 추억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 같았겠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긍정적인 확신으로 가득했다.

크리스마스에는 보통 무얼 하더라. 애당초 신의 생일을 기리는 날이 아니었던가. 얼핏 기억하기로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서로 선물을 준비하고, 평범하게 그리 보냈던 것 같은데. 허나 자신은 둘째 치더라도, 카츠라는 그런 번지르르한 것과 거리를 둔 지 꽤 된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검소와 절제를 곁에 두고 살았던 그는 권력을 쥔 지금에도 호사스러운 식사 같은 걸 하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서양의 기념일이라고 스테이크를 썰고 와인을 들기에는 그림이 영 아닌 두 사람이기도 했다. 적당히 선물과 네가 좋아할 화과자(和菓子)나 조금 챙겨 가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허나 그래서는 크리스마스를 챙긴다고 보기는 애매하니, 화과자에 케이크를 하나 더 살까. 점점 생각이 깊어져서, 타카스기는 안 본 사이에 카츠라의 입맛이 바뀐 것은 아닐까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다가서고 있었다. 긴토키라면 알지도 몰랐지만, 분명 물어보았다가는 이래저래 놀릴 게 뻔했다. 게다가 카츠라와의 관계도 아직 밝히지 않은 상태였다.

선물은 마음이라고는 하나, 그가 기뻐할 것으로 준비하고 싶은 제 마음은 분명 사랑이었다. 이제라도 좋은 연인이 되고 싶어 애를 쓰는 자신을 그는 알고 있을까. 마지막 연기 한 모금을 빨아들인 후, 그는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긴토키가 특별히 내어 준 설고를 포크로 갈라 먹었다. 차와 과자를 다 비우기 전까지 카츠라를 위한 선물을 결정지어야 했다.

 

 

 

* * *

 

 

 

이미 해가 지고 달이 찬 시각이었다. 끝없이 밀려드는 보고와 문서에 지칠 대로 지친 나날이었다. 차라리 칼을 들고 뛰어다니던 때가 그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피곤이 극에 달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피로에 절어 오늘도 개인 집무실에서 밤을 꼬박 지새우나 싶었다. 카츠라는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잠시 창이라도 열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집중하려 머리를 다시 풀고 높이 묶어 올리려는 찰나였다.

 

「카츠라 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이 시간에 손님이라니. 누구인가.”

「가 보시면 아실 거예요.」

“…….”

 

평소라면 답을 에둘러 하진 않을 엘리자베스인데 중한 사람이라도 온 것인가 싶었다. 카츠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머리 묶는 것을 마무리 지었다. 공식적인 업무 시간이 지났기에 편히 유카타 차림으로 나가는 게 영 신경 쓰였으나 고민 끝에 편안히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엘리자베스에게 손님께 먼저 차를 내라 이르고 그는 평소 입은 유카타 위에 하오리를 걸친 후 방을 나섰다.

겨울은 겨울인지 접객실로 향하는 그 짧은 시간에도 몸에 한기가 들었다. 소매 안으로 양손을 넣고 발걸음을 옮기며 이야기의 내용과 상대를 예상해 보아도 영 가늠이 가질 않았다. 안 그래도 본디 양이지사이자 테러리스트였던 자가 정권을 잡았다며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발하는 자들의 목소리도 드셌다. 설마 자신의 반발 세력이 보낸 자객은 아닌가 싶어지자 옆구리에 찬 검이 더 의식되었다. 짧은 시간에 생각이 깊이 파고들었지만, 결국 문을 열기 전까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카츠라는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 방의 문 앞에 서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카츠라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미닫이문을 천천히 열자 보이는 얼굴에 카츠라는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타카스기?”

“즈라. 너, 결국 내가 먼저 걸음하게 만들고 말이다.”

 

자잘한 꽃문양이 수놓아진 기모노 위에 청록색 하오리를 걸쳐 입은 자태가 퍽 고풍스러웠다. 저리 차려입은 모습을 보는 것도 오래간만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오랜만인 것은 그의 얼굴이었다. 카츠라는 미닫이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그에게 다가섰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머리가 조금 더 길어있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머리를 보아하니 두문불출한 모양이군.”

“그래, 꽤 오랜만이긴 하다만, 인사가 정인(情人) 사이에 할 법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잘도 그런 단어를 입에 담는구나.”

“그럼 우리가 정인 사이가 아니면 무엇이어서.”

 

마음을 통한 지는 아마도 십 년도 전이었을 터였고, 연인 사이라 못을 박은 것도 수개월은 되었거늘 단어 하나에 여전히 볼을 붉히는 모습이 퍽 사랑스러웠다. 타카스기는 곰방대의 재를 털어내고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제 품 가득 카츠라를 안았다. 따스한 온도가 몸에 서서히 녹아들었고, 타카스기는 그 온도를 더 깊이 느끼고 싶어 그를 더욱 힘주어 안았다.

 

“머리 이야기를 할 게 아니었잖아.”

“그럼 무슨 이야길 하나.”

“보고 싶었다고 해야지.”

“…….”

“대답이 없네.”

“시끄럽다.”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타카스기가 직접 발걸음 할 줄은 몰랐기에 카츠라는 놀라기도 했고, 그만큼 기쁘기도 했다. 안 그래도 그가 머무는 곳에 영 가질 못해 이것저것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혼자 밥은 잘 챙겨 먹는지, 생활은 어떤지, 너저분하게 지낼 성격은 아니었다지만 그래도. 막상 얼굴을 보니 아주 못 지낸 것으로 보이진 않아 다행이었다. 말보다 행동이 다정해서, 카츠라는 타카스기의 등을 아이 어르듯 다독이다 몸을 살짝 떼어내었다.

 

“그보다 이 밤에 여기까진 무슨 일인가. 물론 낮에 왔다면 바빠서 한참 기다리게 했을 테지만…….”

“그래, 그런 이유도 있고, 그 시각에 갔다가는 손 한 번도 못 잡아보고 돌아갈 게 뻔해서. 이삼 주는 족히 기다린 것 같은데. 잘 기다린 연인에게 상은 없고?”

“상은 무슨 상……. 원하는 것이라도 있어 말을 꺼냈나.”

“입맞춤을 하사하시는 건. 물론 나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긴 한데.”

“…….”

 

홍조가 가라앉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저런 말을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내어놓는 타카스기 때문에 카츠라는 도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럼에도 결국 눈을 감은 채 그의 입술에 제 것을 가만히 포개는 카츠라였다. 살짝 눌린 채 맞닿은 입술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타카스기는 가볍게 카츠라의 입술을 제 입술 새로 가볍게 물었다 놓아주었다. 연한 살이 떨어지며 작게 마찰음을 냈다. 그 소리마저도 카츠라에게는 자극적이었던지, 그는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타카스기의 볼을 제 손가락으로 꾹 눌러버렸다. 그 모습조차 귀여운 투정처럼 느껴져 그의 얼굴은 웃음으로 번져 있었다.

 

“사실, 그보다 더 큰 목적이 있어서. 즈라.”

“목적이라니, 무슨.”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아나. 아, 내일.”

 

타카스기는 말하며 응접실의 중앙에 놓인 긴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카츠라를 향해 제 쪽으로 오라 손짓했다. 카츠라는 반대편에 놓인 소파에 앉아 그의 말을 기다렸다.

 

“네가 데리고 다니는 애완동물 녀석, 이름이…… 엘리자베스였던가. 그 녀석에게 부탁한 게 있으니, 네가 부르면 가져올 거다.”

“엘리자베스에게? 그래서 그 녀석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리 답한 거였군.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나. 세상 살고 볼 일이다.”

“친해지긴. 아무튼 불러 봐.”

“엘리자베스, 밖에 있나.”

 

카츠라가 소리 내어 엘리자베스를 부르자 이내 문이 열렸다. 엘리자베스가 쟁반에 가득 담아온 것은 차와 화과자였다. 늦은 시간까지 일하는 자신을 배려해 군것질거리라도 사온 건가 싶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꺼내려는 찰나 이내 엘리자베스가 다시 밖으로 나가더니 다시 방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을 그리도 많이 준…….”

“내일이 크리스마스라더군.”

“크리스마스라니.”

 

카츠라는 엘리자베스가 초를 꽂아 가져온 녹차 케이크를 보았다가 시선을 타카스기에게 돌렸다. 얼떨떨한 것인지, 아니면 벅찬 것인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표정을 감추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이 지나서야 카츠라는 타카스기를 향해 미소를 보이고는 엘리자베스가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케이크를 보았다.

 

“초코나 다른 걸 사자니 네 입에는 달고 느끼해서 많이 못 먹을 것 같더라고.”

“그런 것까지 생각해서 사 왔단 말인가. 너도 제법 낭만을 알게 된 모양이다.”

“적어도 네가 할 소리는 아니다, 즈라.”

“고맙네, 생일도 아닌데 케이크라니 생소하다. 생일에도 챙긴 적 없긴 하지만. 그보다 홀로 양과자 가게에 들어가 고민했을 거 아닌가. 귀여운 짓을 했구나. 타카스기. 화과자까지 다 준비하고.”

“귀여운 짓은 무슨……. 촛농 떨어질라. 얼른 불어라.”

“같이 불어야지. 엘리자베스도 함께하자. 이리 오거라.”

「저는 초만 불고 먼저 들어가 잘게요, 카츠라 씨.」

“그래. 셋을 세고 같이 부는 거다.”

 

카츠라가 셋을 세고, 딱 그 수의 지구인 둘과 천인 하나가 함께 촛불을 껐다. 짧게 기념하며 박수하고, 카츠라는 쟁반에 엘리자베스가 먹을 만큼의 케이크를 잘라주었다. 그리고 곁에는 화과자 몇 개를 얹어 그에게 건네자 그는 팻말에 감사하다는 말과 밤 인사를 써 보이고는 방을 나갔다. 미닫이문이 닫히자 카츠라의 얼굴에 자상한 웃음이 걸렸다.

 

“어지간히 아끼는 모양이야.”

“당연하다.”

“나보다도?”

“……말을 해도.”

“장난이다. 장난. 얼른 먹어.”

 

질문이 얄궂다는 얼굴로 타카스기를 바라보다, 카츠라는 포크로 케이크를 작게 잘랐다. 그는 조각낸 케이크를 찍어 먼저 그의 입에 가져다 댔다. 먼저 먹으라며 한사코 손을 내젓던 타카스기는 먼저 먹지 않으면 안 먹겠다는 카츠라의 말을 듣고서야 먼저 입을 벌렸다. 적당히 쌉싸름하고 달콤한 케이크가 입 안에서 녹아내렸다. 제법 맛이 괜찮아 잘 샀다는 생각을 하자 카츠라 역시도 입에 맞는다는 평을 내놓았다.

 

“그보다 성탄절을 챙기러 걸음 하다니. 바다 건너의 기념일도 챙길 줄 아는 녀석이었나.”

“무슨 날인 것 같았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더라고. 칩거 생활 하자니 세상 돌아가는 걸 알 수 없어 밖에 나왔더니만 내일이 크리스마스라고 하더군. 급작스럽게 생각한 것이기도 했고, 겸사겸사 너 놀라게 해 주려고 부러 언질 없이 왔다.”

“그 나이를 먹어서도 그리 장난을 치고 싶더냐.”

“장난이라니. 이벤트라고 해라. 그보다, 술이 없어 아쉽게 됐네.”

“내올까.”

“그래 준다면야.”

 

카츠라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방에 다시 들어왔을 때 손에 들고 온 건 청주와 안주 몇 가지였다. 역시, 와인이나 위스키 같은 양주보다는 입에도, 분위기에도 청주가 제일이었다. 방해할 사람도 없을 터였다. 타카스기는 테이블 위에 술과 안주를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으려는 카츠라의 팔목을 잡아 제 쪽으로 살짝 끌었다.

 

“뭐냐.”

“같이 앉아 마셔.”

“우리가 여태 따로 앉아 있었나. 같이 있었으면서 무얼.”

“그게 아니라, 이 옆에서.”

“몇 주 사이에 늘어온 건 능글맞은 말뿐인가.”

“능글맞긴, 하고 싶은 걸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못 이기겠다는 듯 웃어버리고 결국 카츠라는 타카스기의 옆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타카스기는 술을 따 제 잔과 그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그를 조금 더 제 쪽으로 끌어당겨 앉힌 후 손에 술잔을 쥐여 주었다. 거리가 가까워 쑥스러운 것인지 내내 제게 시선을 못 맞추고 속눈썹을 드리운 모습이 아름다워 술은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꼭 취한 듯 어지러웠다. 당장이라도 저 입술에 제 입을 부비며 사랑한다고 몇 번을 말하고 싶은지 알기나 할까. 타카스기는 그 충동을 잠시 억누르고는 제 잔을 들었다.

 

“건배할까.”

“무엇에.”

“성탄과 너에게.”

“그리고 네게도 말이다, 타카스기.”

 

말을 마치고 잔이 부딪쳤다. 얕게 부서지는 소리가 채 사라지기 전에 목을 타고 술이 넘어가는 소리가 그 위를 덮었다. 술이 유난히 달았고 타카스기는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잔뼈가 굵고 굳은살이 가득 박인 그의 손이 카츠라의 손 위로 겹쳐졌다. 손등이 전보다 까슬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던 순간 카츠라가 타카스기의 손에 깍지를 껴왔다.

 

“몸은 제대로 챙겨가며 하는 거냐.”

“피곤하지 않다면 거짓이지만, 전쟁을 치를 때만 하겠나. 힘들다고 말한다면 전의 모든 굴욕과 고통을 잊고 타성에 젖은 인간이라 해도 부족한 욕일 터다. 괜찮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래. 그렇다면 다행인데, 나는 좀 후회가 되어서.”

“무엇이.”

“그놈의 장군이고 리더고 다 던져두고 연애 초의 깨 볶는 생활을 좀 즐겼으면 오죽 좋나, 하고.”

“가끔 보면 어딜 봐서 네가 여인 앞에서 목석같이 굴었다는 사내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요즘 긴토키라도 만나는 건가. 그 녀석에게 물든 거라면 이해라도 하겠다만.”

“요즘 정치하면서 노인네들 상대로 하는 유머는 그거냐.”

“너야말로. 연애 초의 깨는 무슨.”

“깨 맞지.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도 일밖에 모르는 사내 기다리다 제 손으로 먼저 케이크에 화과자 싸 들고 직접 일터까지 찾아온 게 연애 초 깨 볶는 게 아니면 대체 뭔데. 아, 하나 빠졌네.”

“뭐가 말이냐.”

“선물.”

 

타카스기는 자연스럽게 제 기모노 소매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연달아 제게 주어지는 것들에 카츠라는 대체 무언가 싶다가도 그가 건넨 상자를 군소리 없이 받아들었다.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상자를 두르고 있던 리본 끝을 잡아당겼다. 스륵 소리를 내며 풀리는 끈을 제 옆에 놓아두고 상자를 열었다.

 

“……타카스기.”

“마음에 안 들어?”

“안 든다기보다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갈 일이 많을 테니 반지나 다른 건 무리일 것 같아서. 어차피 너는 타비(足袋)로 발을 가리고 다니니 발찌를 하더라도 어디 보일 일은 없을 것 아니냐.”

“이런 걸 준비할 생각은 또 어찌하고…….”

“우선 네 발부터 이리 내.”

“내라니, 혼자서도 할 수 있다.”

“원래 이런 건 정인이 해주는 것 아니겠어.”

 

살짝 거리를 벌려 앉은 후 그는 카츠라의 발목을 잡았다. 한 번 정했다 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인 걸 잘 알았기에 카츠라는 결국 제가 먼저 뜻을 접고 그를 향해 발을 내밀었다. 타카스기가 찾아온 것보다 조금 더 이른 시각에 목욕했던 참이라, 그의 발은 주중처럼 타비를 신은 발이 아니었다. 타카스기는 그의 맨발을 진득하니 보았다. 안 그래도 마른 체형인 데다 늘 천으로 가리고 있으니 발목도 희고 얇았다. 이 발목을 참 좋아해서 정사(情事)를 나누는 밤이면 몇 번이고 복사뼈와 발목이 이어지는 움푹 파인 틈에 입을 맞추었던지.

그래서 그의 발목에 은붙이를 걸어주고 싶었다. 금과 카츠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빛은 가졌으나 수수하고 얇은 은줄이라면 단아하고 사치를 모르는 그와 잘 맞아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금은방을 찾자 제가 상상한 것과 딱 맞는 발찌가 있었고, 타카스기는 그것을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더랬다. 카츠라를 이곳에서 기다리는 동안 이 발찌를 찬 그를 상상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리고 실로 그 상상은 눈앞에 보란 듯이 펼쳐졌다. 제 손으로 둘러준 발찌는 그와 한 치의 부조화도 없이 잘 어울렸다. 타카스기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이 장식은 월계수 잎인가.”

“응. 그저 은줄로만 하면 너무 밋밋할 것 같잖아.”

“네 취향은 아닌 것 같다. 더 화려하고 풍성한 걸 좋아하지 않나.”

“너와 어울리는 걸 고른 거니까. 그 월계수(月桂樹) 잎까지 완벽했다.”

“…….”

“네 이름도 생각해 고른 것도 맞지만……. 즈라. 기억해?”

“무얼 말이냐.”

“선생님께서 예전에 월계수에 대해 말씀해 주신 것 말이다.”

“……응. 네가 말하니 기억난다.”

“나무가 의미하는 건 승리, 잎이 의미하는 건 죽어도 변함이 없다는 말.”

 

둘은 그 말과 함께 지금은 더욱이 아득하고 아련해진 기억을 되짚었다. 가끔 스승이 날이 좋을 때 자신들을 데려가던 커다란 월계수 밑. 그 월계수 밑에서 언젠가 스승은 저 이야기를 하며 카츠라의 이름을 쓰는 한자는 월계수의 계(桂) 자와 같다는 말도 덧붙였었다.

 

“그 월계수가 참 너와 닮았다는 생각을 아마 그때부터 했던 것 같다. 승리를 위해 꼬리를 말더라도 살아남는 걸 택하면서, 그게 네 주변을 지키고 너를 지키는 승리였기에 지금 네가 여기에 있는 거겠지. 너는 정말 변하지 않을 것 같았어. 그리고 정말 이 나이가 되도록 털끝 하나 변하지 않았고. 그리 생각하니 이걸 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 같더군.”

“…….”

“즈라, 잘 어울린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말을 마치고 타카스기는 제 허리를 숙여 그의 발등에 제 입술을 조심스럽게 묻었다. 마치 고결한 것을 대해 격을 차리는 사람의 모습과도 같았다. 카츠라는 제 발에 내려앉은 작은 온기를 느끼며, 은은한 보랏빛이 감도는 그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손길에 고개를 들자 시선이 서로 얽어 들었다.

 

“즈라.”

“응.”

“끝까지 이겨.”

“…….”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더라도 변하지 말고.”

“……알았다.”

“모든 것에서 이긴 네가, 다음에 올 크리스마스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나의 연인으로 있어주었으면 해. 그때에는 너를 즈라라 부르지 않을 거다. 그건 되먹지 못한 친구 놈이 널 부르는 것일 테고.”

“…….”

“나는 그 날에 널 사랑이라 칭할 테다.”

 

많은 감정이 녹아있는 한 마디였다. 카츠라는 자상하고도 듬직한 제 연인의 얼굴을 찬찬히 제 눈에 아로새겼다. 타카스기에게 내밀었던 발을 아래로 거두고, 카츠라는 그에게 다가가 목을 끌어안았다.

 

“고맙다.”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은 채 나온 말은 살에 막혀 조금 뭉그러져 있었지만, 타카스기의 귀에는 직접 속삭인 것처럼 한 음절도 빠지지 않고 잘 들렸다. 그는 카츠라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다가, 두 팔을 벌려 그를 마주 안았다. 방 안에는 서로의 숨소리만 가득했다.

 

“자정까지 얼마 남지 않았겠지.”

“그럴 터다.”

“즈라.”

“……응.”

“메리 크리스마스.”

“타카스기.”

“응.”

“……메리 크리스마스.”

 

서로의 인사가 끝나고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창밖에는 눈송이가 느리지만 담뿍 내리고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였다.

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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