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12 Happy birth day
Yang Si Baek
[양시백]그 겨울, 그 아이
W.소음(消陰/@mist_of_soeum)
-회색도시2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간선이 날조 되어 있습니다.
손 끝부터 얼어붙는 감각이 느껴졌다. 하아, 춥네. 손가락 마디마디가 삐걱이며 굳어있었다. 이래서는 격투기도 안 된다고. 손을 대충 털고는 격투장에서 나왔다. 돈도 많다고 들었는데 격투장에도 난방기 좀 설치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소년 티를 벗어나지 못한 남자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답답한 복도를 지나 좁은 방으로 들어섰다. 방 안 난로 위에 얹어진 주전자 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 딱 맞춰 들어오네. 분명 나이는 남자와 엇비슷했지만 조금 일찍 들어온 청년이 물이 끓는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8... 그 몇 번이냐 그래, 81871061101번 이였지. 물 끓여 놨는데 컵라면 먹을거냐? 그 번호를 다 기억하고 있냐? 너도 참 대단하다. 나는 이걸로. 남자는 청년에게 컵라면을 집어던졌다. 어떠냐 이 몸의 기억력이? 악 이걸 던지면 어쩌냐 손수 물도 끓여준 은인에게. 청년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컵라면 물 끓여 줬다고 은인이야? 내가 라면만 몇 번을 끓였는데. 그리고, 둘이 있을 때엔 이름 부르는게 편하지 않아? 나는 양시백이라는 이름이 있다고. 시백은 볼멘 소리를 내뱉었다. 청년은 순간 행동을 멈췄다. 재밌는 소리를 하네 너, 그런 데 말이야 입 조심하는 게 좋을 걸? 여긴 이름이 필요하지 않은 지옥이니까. 청년은 씁쓸하게 웃었다. 둘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앗, 뜨거- 이 주전자 뜨겁네. 라면 빨리 익었으면 좋겠다. 청년은 언제 씁쓸해 했냐는 듯 너스레를 떨며 라면타령을 했다.
그래, 이런 곳이였지 여기는.
시백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입에서 쓴 맛이 감돌았다. 자자, 너무 침울해 하지만 말고. 컵라면이나 먹자고. 물론 과자 상태의 컵라면을 먹기 싫다면 조금 더 기다리는 게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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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따뜻하니 좋네. 이대로 자고 싶어. 뭐, 호출도 없겠다. 좀 자두는 게 어떠냐. 그래, 30분만 있다가 깨워줘. 시백은 좁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청년은 게임기를 꺼내들고 제 침대에서 다리를 뻗었다. 뿅-뿅- 거리는 게임기 소리가 작은 방을 울렸다. 소리 좀 줄여. 잠 좀 자자. 아, 미안. 청년은 게임기의 소리를 줄였다. 시백은 눈을 감았다. 삘릴리리- 삘릴릴리- 또 뭐야. 야, 호출 떴다. 아오, 무슨 잠을 잘 수가 없네. 시백과 청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번엔 또 뭔데. 몰라, 가봐야 알겠지. 사람 죽이는 일만 아니면 좋겠네. 그 일이면 몇 명만 불렀겠지. 뭐, 그렇겠지. 빨리 가자고. 이봐, 빨리 안 나오고 뭐해?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두 사람은 서둘러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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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으, 춥다. 이 추위에 언 땅에 삽질이라니. 시백은 들고 있던 삽을 땅에 꽂고 턱을 손잡이에 올려 기대었다. 어이, 81871061101번 너 뭐하냐? 빨리 빨리 하자고. 멀지 않은 곳에서 독촉하는 관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참, 내가 죄수도 아니고. 빨리 하면 되잖아요! 거, 더럽게 재촉하네. 시백은 짧게 투덜거리고는 다시 삽을 쥐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며칠이더라. 아저씨, 오늘 며칠이야? 시백은 관리자에게 외쳤다. 날짜가 뭐가 중요하냐, 어디보자. 오늘이... 12월 11일이네. 궁금증 풀렸으면 어서 일 해! 아, 알았다고요- 시백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삽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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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으, 죽겠다. 오랜만에 삽질했더니 몸이 다 찌뿌둥하네. 시백은 물기를 대충 털어내며 낡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얜 또 어디 간거야. 씻는 데 뭐 이리 오래 걸려? 으음. 어쩐지 불길한 기분인데. 시백은 베개에 고개를 깊이 파묻었다. 끼익- 문이 열렸다. 어, 왜 이렇게 늦었냐. 뭐어, 일이 있어서. 왜, 외로웠어? 아니면 혼자가 무서웠어? 귀신도 무서워 할 인상인게. 왠 일로 그렇게 날 반긴대? 장난스럽게 씨익 웃는 청년에 시백은 뭐 잘못 먹었냐? 반기긴 누가 반겼다고 그러냐. 하며 질색했다. 에잉, 너무 차갑잖아. 응? 주머니에 손을 넣은 청년은 빙긋 웃으며 시백에게로 다가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시백은 몸을 일으켰다. 아까 왜 이렇게 늦었냐고 했지? 회장님 명령이 떨어졌거든. 청년은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나도 이러긴 싫은데 말이야. 이행하지 않으면 죽는 건 이쪽이라. 죽기는 싫거든. 뭐, 그간의 정을 봐서 한 번에 보내줄게. 청년의 주머니에서 날붙이 하나가 반짝이며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청년은 나이프를 휘둘렀다. 날붙이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시백은 침대에서 미끌어지듯 내려왔다. 회장님 명령이 뭔 진 몰라도 꼭 그렇게 위험한 거 휘둘러야겠냐? 어쩔 수 없잖아. 회장님 명령이 81871061101번, 양시백 너를 죽이라는 건데.
나를? 왜?
멍한 물음에 대답 할 사람은 없었다. 시백은 나이프를 찔러오는 청년의 팔을 꺾어 나이프를 빼앗아 떨어뜨렸다. 아야야, 아프잖아. 하는 청년을 뒤로한 채 시백은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뭐, 복도에도 가득 차 있기는 한데. 행운을 빌게.
어두운 방에 홀로 남은 청년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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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알고는 있었지만 더럽게 많네. 이 방 저 방에서 튀어나오는 이름 모를 남자들이 시백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여기 있으면 죽는다. 긴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복도는 왜 이렇게 길고 복잡한 건지. 미처 피하지 못한 공격들에 시백의 몸에도 생채기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가 도망쳐 나온 불 꺼진 복도에 울렸다. 왠 일인지 코너를 돌고 나서는 시백에게 오는 공격들이 확 줄었다. 바깥쪽이 소란스러운데. 침입자라도 있는걸까. 누군진 몰라도 덕분에 이 복도에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겠지. 그래도 아직 시백의 근처에는 두어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시백은 입술을 꾹 깨물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와 동시에 달려드는 두 사람의 첫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시백은 반격할 틈도 없이 몰아치는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이렇게 죽기 싫어. 공포에 질린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살아야한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 때였다. 뒤에서 한 사람이 더 튀어나온 것은.
시백은 눈 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세 명을 한 번에 상대하기에 시백은 너무 지쳐 있었다. 양시백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것 같았지만 어짜피 제 번호를 기억하지 못한 자의 말이겠지. 여긴 그런 곳이니까. 뒤에서 튀어나온 남자는 어둠 속에서 사람이 구분이 안되는 것인지 시백의 앞에 있던 두 사람을 쓰러트렸다. 남자는 이제 시백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 만하지 않을까. 시백은 공포감에 부들거리는 주먹을 다시 꾹 쥐고 남자에게로 달려들었다.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내용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순간, 뒷목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정신을 놓아선 안 돼.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아득하게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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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맞아죽기라도 했나. 온몸이 욱신댔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올리니 새하얀 콘크리트 천장이 시백을 반겼다. 나 살아있는 건가. 시백은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끄응. 뻐근한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지만 움직이는 데에 무리는 없었다. 병원 응급실인듯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싱에 들어왔다. 아, 환자분 깨어나셨네요. 어젯 밤에 쓰러져 계신 게 발견 되셔서 119에 구조 되셨었어요. 가파른 절벽에서 떨어지셨던 것 같은데... 몸은 좀 괜찮으세요? 걱정스럽게 물어오는 간호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타박상만 있어서 곧 퇴원하셔도 될 거에요. 간호사는 저 멀리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 쪽으로 가버렸다. 병원비는 어쩐다. 시백의 시선이 벽에 걸린 거울에 닿았다. 목에 은색의 작은 판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이게 뭐지. 하고 고개를 숙였다. 닳고 닳아 이름을 제대로 식별할 수는 없는 군번줄이었다. 아마도 자신을 그 지옥에서 꺼내준 사람의 것 일테지. 시백은 군번줄을 꽉 쥐었다. 언젠가 만난다면 돌려주리라. 병원의 전자시계가 12월 12일 오전 9시 45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최고의 생일선물이네요.
시백은 이름 모를 은인에게 닿지 않을 말을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