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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리 맑은 날이었다. 반질거리는 도장의 나뭇 바닥이 새벽 햇살에 밝게 물들었다. 아직 도장을 열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일찌감치 잠에서 깬 양시백은 더 닦을 것도 없는 도장 구석구석을 계속해서 청소했다. 하루를 시작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도장을 청소하고 있으면 기억 속에 묻혀있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텅 비었던 보호구 보관함도 어느샌가 꽉 들어차 있었다. 관장님의 도장을 살려보겠다고 불철주야 뛰어다닌 결과였다.
 

보관함 위의 트로피가 눈에 띄었다. 조심스레 내려 다시 한번 닦았다. 반짝이는 트로피에 비친 얼굴에 최재석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자취를 감추었다 갑자기 나타나 도장은 잘 돌아가냐며 능청스럽게 웃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좀 더 살갑게 굴 걸. 주먹부터 날리기 전에, 소리치며 화내기 전에 괜찮냐고, 많이 걱정했다고 말할걸. 양시백은 도장 곳곳의 차마 치우지 못한 최재석의 흔적들이 눈에 띌 때마다 후회했다.
 

도장 안의 추억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닐 때면 흘러가는 시간이 느껴지지 않았다. 물건 하나하나에 기억이 맺혀 떠올리다 보면 어릴 적 그때로 돌아가있곤 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낡은 보호구 보관함도, 나오지 않는 고철 TV와 라디오도, 양시백의 기억도 그대로인데 그 안에 담긴 최재석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낙법을 왜 배우는지 알아? 빠르게 일어서기 위해서야!'
'넌 잘할 거야. 내가 있으니까!'

 

무엇을 하든 자신을 믿는 사람. 사람을 믿지 못하던 자신에게 처음으로 진심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최재석이 보여준 믿음은 양시백을 혼자에서 꺼내 주었고, 버림받을까 두려웠던 감정이 언제였는지조차 잊게 해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난 잘 하고 있는 걸까. 답이 오지 않는 물음을 자꾸만 허공에 던졌다.

 

의식은 떠나버린 사람들에까지 흘렀다. 사라진 하태성을 찾으려 밤낮없이 단서를 찾아 헤맸지만, 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몇 달째 이어지는 수확 없는 조사에 지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들의 마지막 부탁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이를 지켜 달라던 배준혁, 하태성을 챙겨 달라던 유상일의 마지막 부탁. 그들이 양시백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저... 시백이 오빠 있어요?"
반가운 작은 목소리에 생각이 흩어졌다. 홍설희가 도장 밖에 주춤거리며 서 있었다. 한달음에 달려가 안아올렸다. 이제야 아이다운 맑은 웃음이 얼굴에 떠오른다. 품에 기대오는 자그마한 머리를 쓰다듬으니 아이 특유의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진다.
"이렇게 일찍 어쩐 일이야? 깜짝 놀랐어."
홍설희는 대답 대신 품에 안고 있던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오빠, 생일 축하해요."
양시백은 상자를 받아들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홍설희를 바라보았다.
"양시백이, 설마 자기 생일도 까먹은 건 아니겠지?"
뒤이어 들려오는 서재호의 목소리에 도장 문을 건너다보았다. 서재호와 권혜연이 웃으며 양시백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시백씨, 생일 축하해요."
서재호와 권혜연도 양시백에게 선물을 내밀었다.
"아, 뭐 이런 걸 다... 고맙습니다."
괜스레 머리를 긁적이며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눈앞의 것들만을 신경 쓰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아니 이거, 표정을 보니 진짜 몰랐던 눈치네."
서재호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양시백을 보았다.
"오빠, 오늘은 저랑 놀면 안 돼요?"
도복 자락을 잡아당기는 손에 내려다보니 홍설희가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시설에서 지내면서 많이 심심했던 눈치다. 차마 거절할 수 없는 그 눈빛에 양시백은 언제나 항복하곤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에 손을 얹으니 환하게 웃으며 서재호와 권혜연을 돌아본다.
"아저씨랑 언니도 같이 놀아요!"

양시백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도장으로 돌아왔다. 불 꺼진 도장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아직 익숙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이는 호의가, '모두'에 속해있다는 사실이. 그들이 진심이길 바라면서도, 진심이란 걸 알면서도 문득 불안감이 싹트곤 했다. 내가 이 일상을 누릴 자격이 있을까. 눈을 뜨면 다시 혼자가 되어있진 않을까. 곁에 아무도 없는 지금은 온몸을 지배하려 드는 불안감을 오롯이 혼자 버텨내야 했다.
눈앞이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진다. 관장님, 준혁 선생님, 그리고 하태성... 모든 기억이 한데 얽힌다. 양시백은 밀려드는 기억 속에서, 찾아 헤매는 사람을 만나길 바랐다. 말 없는 달빛이 그의 회색빛 기억을 감싸 안았다.

양시백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도장 문도 잠그지 않은 채 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다. 문득 눈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11시 50분. 특별할 것도 없었던 생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만나길 바랐는데, 꿈에서조차 만나지 못 했다. 도장 문을 잠그지 않은 건 어쩌면 네가 찾아와주길 바라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헛된 바람이 되어버렸다. 다시 찾아오는 막막함에 불 꺼진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까워지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11시 30분. 하태성은 연신 시계를 확인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동안 한 가지만을 바라보았다. 돌아갈 곳도, 나아갈 곳도 없었던 자신에게 가야 할 길을 찾아 주었던 그의 말. 그 말이 하태성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다른 것을 바라보고 싶었다. 의미 없는 늦은 축하는 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그리웠다. 그에게서 느꼈던 짧지만 깊게 박힌 유대감이.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지켜보기만 했던, 이미 익숙해져버린 그곳으로. 나에게 언젠가 돌아갈 곳이 생긴다면, 그때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시간은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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